평정심에 대하여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끝나지 않는 나의 데일리 목표가 있다. 평정심 유지하기.
말이 쉽지 솔직히 세상 살면서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고 항상 평안한 마음을 유지' 한다는 게 가능이나 할까?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평정심을 지키지 못해 이런 일에 화를 내고 저런 일에 괴로워했다고 고백한다. 근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차례가 된 것 같다. 사실 매일 '평정심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멀쩡한 마음도 어지러워 지기 때문이다.
평정심. 외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솔직히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우리의 생각과 인식, 반응이 없이 일정했다면 우리는 결코 호모 사피언스로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 된 이유는 끊임없이 걱정하고, 부단히 노력하고, 조금이라도 나아져 보겠다고 발버둥을 '가장 많이'쳤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지 않았을까? 그 덕분에 수명도 길어지고 옛날보다 훨씬 오래 살게 되니, 이제는 오래 사는 게 걱정이고 문제다. 결국 우리는 진짜 문제라서 걱정하고 스트레스받기보다는 스트레스라고 여기는 문화에 취해서 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맞는 듯하다.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자.
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어제까지 양호 했던 실적이 오늘 또 불안함을 보였다. 점심때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고, 노트북에는 정리되지 않은 일들이 복잡하게 늘어져 있었다. 오늘 하루를 가만히 돌아보면 기분 좋을 일이 거의 없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지금 이쯤에는 습관적으로 내일 걱정을 하며 '아.. 사는 거 참...' 이런 대사가 나오는 게 정당하다.
그런데, 먹을게 있어 굶지 않고, 입을 옷이 있어 춥지 않고, 차가 있어 먼 곳에 가도 피로하지 않고, 와이프가 있어 외롭지 않고, 내일의 해가 뜨면 또 다른 기회가 생길 것이고, 특별히 몸 아픈 곳 없이 숨 잘 쉬고, 커피도 마시고 , 홍차도 마시고 등등 또 충분히 즐거울만한 하루였기도 하다.
하루에도 몇번식 기분이란 놈은 왔다 갔다 한다. 문제는 잘 안 풀리고 짜증 나는 일이 일어나서 짜증을 내기보다, 짜증을 내야 일이 풀려나간다고 믿는 우리 문화 때문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평정심은 행복과 비슷하다. 잡히지 않지만 잡으려 하는 그 무언가 같다. 하지만 또 분명히 훈련과 단련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언제나 행복한 사람들이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의 공식을 아는가? "행복 = 가진 것 / 원하는 것" 이다. 즉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다. 분모, 원하는 것이 작을수록 결괏값인 행복은 커진다. 아마 좀 식상한 이야기이겠지만 옛날부터 깨달음을 가진 자들이 즐겨 쓰던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에 스토아 학파라는 집단이 있었다. 이들 역시 행복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 그 답을 금욕주의에서 찾았다. 그 논리는 이렇다. 행복이란, 상황에 맞는 역할을 이행할 때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삶은 아무리 부유하건 덜 부 유하 건을 떠나서 마음을 단속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얘기다. 일정한 조건은 구비되어 있는데 거기에 맞추어 가느냐? 아니면 불만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면서 살 거냐? 행복을 원한다면 상황/조건에 맞추라! 이 말이다.
이 논리를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이 일명 '견유파' 즉, 개 같은 유생이라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알랙산더 대왕이 뭐 필요한거 없냐고 물어봤을 때, "비켜, 햇빛 가리지 마"를 시전 했던 쿨가이, 디오게네스가 있다. 이 사람이 보기에 관습과 부조리의 세상은 부질없고 자연과 이성적인 판단이 최고였다. 그냥 욕심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목숨만 부지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실제로 '잃을 게 목숨밖에 없어 너무 행복하다'라고 외쳤다. 디오게네스가 세상의 관습과 부조리를 조롱하는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하나가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만일 당신이 가운데 손가락을 펴서 보여주면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새끼손가락을 펴서 보여주면 화내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반응이며 관습인가?"
흔히 스토아 학파와 반대 개념으로 생각하는 쾌락주의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들이 서로 전혀 다를 두 개의 논리를 시전 했기보다 각각의 스타일로, 자신들의 언어로 피력한 것이 후대에 잘못 해석되지 않았나 싶다. 에피쿠로스가 말했던 쾌락은 먹고, 마시고, 음탕한 쾌락이 아니다. 여기서 쾌락은 잘못된 번역이다. 당시 언어로 '아타락시아'는 고통이 소멸된 상태, 즉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고통을 없애려면 욕구를 다스려야 한다고 보면서, 욕구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자연적이면서 필요한 욕구, 생존에 필요한 먹고 마시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것, 비싼 재료로 만든 좋은 음식 같은 것들 말한다. 셋째는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구, 명품이나 보석을 말한다. 에피쿠로스는 자연적이면서 필요한 욕구만 충족해야 고통을 극소화할 수 있고, 고통이 극소화되어야 아타락시아, 고통이 없는 평정심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여담으로 에피쿠로스가 죽음에 대해서 말한 부분을 살펴보면 그의 철학의 진수를 알 수 있다.
"내가 존재하는 한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따지고 보면 디오게네스나 에피쿠로스나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아닌가?
심지어 불교의 석가모니(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를 꼭 읽어보라) 역시 일체개고를 말했다. 모든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나는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하고자 하니, 여기서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
예수 역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말했다. 마음이 가난하다, 욕구가 적다는 뜻이 아니겠나?
노자 역시 '무위자연', 자연에 순응하라는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깨달음을 얻은 자들의 일관되게 하는 말이다. 되도 않는 욕구를 가지고 안된다고 불평하지 말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 주어진 조건, 자연스러운 지금, 에 맞추라고. 그래야 평정심을 가질 수 있고, 인생이 덜 고통스럽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