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이 국민당을 이기고, 일본은 미국에 패망했다.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다. 초대 주석인 마오쩌둥은 공산주의 꿈을 이룩하기 위해 대약진 운동, 문화 대혁명을 거쳐서 1976년까지 27년간 통치한다.
대약진운동은 뭘까?
대약진운동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시행된 국가 정책으로, 공업과 농업분야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했다.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나눈다는 매우 단순한 공산주의식 정책이다. 정부에서 생산량을 미리 정하고 인민 전체가 그 할당량을 맞추는 식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 단순해서 당시 지도부의 뇌가 너무 순진한건 아닌가? 싶지만 어쨌든 실행되었다. 소위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라던가,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기업에서 상명하달 식의 목표달성 같은식이다. 나 역시 망해가는 대기업에서 있어봤기 때문에 이런식의 정책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공상주의다. 중국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약 4000만 명이 굶어 죽는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가 굶어 죽었다고 보면 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약3000만명이상이 죽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약 5000만명이 죽었는데, 대약진운동으로 죽은 사람수가 세계대전과 대등한 수준이다. 마오쩌둥은 군사적으로는 천재였지만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아마도 생산활동을 게릴라전투와 똑같이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명령으로 일사분랑하게 움직이는 게릴라 부대처럼 명령을 내리면 자신의 생각처럼 생산이 될 것이라고 여긴것 같다. 결과는 처참했다. 가장 대표적인 일화가 두개 있다. 토법고로土法高炉와 제사해除四害운동이다.
토법고로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철을 생산하는 방법이다. 전통적으로 대장장이들은 철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적정량의 탄소를 주입하여 생산했는데 이 과정은 실로 고도의 숙련된 노동이었다. 그러나 토법고로에 투입된 전국의 인원은 제철과 제련과 전혀 관계없던 농민이었는데, 동원된 수가 9천 만명이었다. 게다가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량을 맞추지 못하면 배급,배식에 패널티가 주어져 현장에서는 어떻게든 할당량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었다. 집안의 밥그릇, 숫가락까지 토법고로에 집어넣고, 심지어 멀쩡한 농기구나 트랙터까지도 집어넣어 할당량을 맞추었다. (농기구를 만들려고 하는 일인데 멀쩡한 농기구를 집어 넣는 사태가 벌어진...현장을 모르는 상사의 상명하복이 이렇게 어이없는 짓이다)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진 철 중에서 제대로 만든어진 철은 40% 정도였고, 나머지는 쉽게 깨지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제철은 고열로 철을 녹여야 한다. 불을 피우기 위해서 산에 나무들을 모두 베어 땔감으로 사용해 민둥산이 되었고 홍수나 산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결국 고법고로로 제대로된 농기구도 만들지 못하고 기존 사용하던 기구들조차 쓰레기가 되어 농사를 지을 수 없게되자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다.
제사해除四害 운동이란, 해로운 4가지를 제거하는 것인데 여기서 해로운 4가지는 참새, 쥐, 모기, 파리이다. 이들 중 참새가 농작물을 먹어치워 인민이 먹을 양식을 거덜낸다하여 가장 해로운 것으로 취급되었다. 1958년 한해동안 죽인 참새가 2억마리를 넘겼다. 재미있게도 '해로운' 참새를 다 잡아버렸기 때문에 모기, 파리 등 해충이 들끓었고 전보다 더 심하게 전염병이 돌았다.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참새가 먹는 식량보다 더 많은 식량을 잃었다. 결국 공산당 지도부에서 소련에 참새 20만 마리를 공수받아 자연번식 시킴으로서 이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수많은 희생이 따랐다.
또한 새로운 작황법을 실행한다하여 모를 심을 때 전보다 2배 빽빽하게 심도록 했다. 동일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2배가 된다는 이론이었지만 공간이 부족한 모종자가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해 말라죽어 흉년이 든 지역이 태반이었다. 전통적으로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이런 '획기적인' 농업정책을 폄으로써 인민을 구하려 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공산당 지도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민당을 몰아내고 건국 성공에 너무 지나친 자신감을 가진 건 아니었을까? 잘나갈 때 항상 조심하라는 말이 떠오른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 했던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이런 '획기적인' 정책으로 수천만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의사 결정권을 독차지하게 되면 이런 터무니 없는 정책들이 나올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과거에 성공했던 방식을 계속해서 고집하기 마련인데, 과거에 통했다고해서 현재 통하란 법은 절대 없을 뿐더러, 대다수가 같은 방법으로 다시 시도하면 망한다. 국가뿐만 아니라 현대 기업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예들을 들 수 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공산당 내에서도 마오쩌둥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며 1959년 주석직을 사임한다. 류샤오치가 그 뒤를 이어 국가주석직을 맡는데, 마오쩌둥이 실제로 권력을 내려놓았다기 보다 자신의 과오가 크니 일단 후퇴한 것이다. 류샤오치는 망가진 경제를 일으키려 안정화 시키기위해 수요중심의 정책을 폈다. 그 동안은 앞뒤 안가리고 벼생산, 철생산 등 생산만 외쳐 망했으니 이제 생산보다 수요를 따르자는 정책을 실행했다. 이에 따라 시장정책이 실행되어 경제가 안정되면서 자급자족을 중심으로한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정책이 폐기되자 마오쩌둥은 사구四旧,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 즉 네 가지 낡은 것들을 파괴한다는 이름으로 문화대혁명을 선포한다.
여전히 대다수의 인민들이 무산계급이었던 점이 다시 한번 통했다. 전국에서는 홍위병이 일어나 전통과 관련된 모든 유물을 부셔버리고 옛서적을 불태워버렸다. 낡은 권위를 타도한다는 명목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부모와 스승을 구타하고 지식인과 예술인들을 싸잡아 농촌으로 보내 강제노동을 시킨다. 다시 고개드는 봉건적 권위주의, 부르주아적 자본주의를 제거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 기간동안 다수의 지식인들이 압박과 구타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희생된 인원은 공식적으로 약 3만4천8백명이라 기록한다.
이런 마오쩌둥의 평가는 두 가지로 갈린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에는 전략과 전술의 신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만, 건국 이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을 약 20년간 정지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잃어버린 20년?) 창업과 수성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마오쩌둥 자신이 과거 교조주의를 절대 금기시 했지만, 건국 후 오히려 자신이 신이 되어버리면서 적지 않은 과오를 남겼다. 현재 중국공산당의 자체적 평가로도 마오쩌둥이 건국의 아버지로 그 업적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과오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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